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8세 (문단 편집) ==== 반발과 반란 ==== [[수도원]]의 통폐합이 집행될 무렵,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흉작과 그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가지 부작용이 야기되었다. 흉작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은 그나마 종교 행위로 심리적 위안을 얻고 있었는데 이를 방해받는 결과가 되었거나, 특히 [[환속]]한 [[수녀]]들의 경우에는 새출발을 위한 지원금이 모자라는 상황이 생겼다.[* '자립을 돕기 위해서는 경제 활동에 제약이 더 큰 쪽이 오히려 더 몫을 받아야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이 얼마나 대단하고 기발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수도원의 통폐합은 오늘날로 치자면 복지 시스템을 [[대격변]] 수준으로 갈아엎은 셈이었는데, 본당 단위로 관리되는 새로운 구휼 체계가 1536년도에 의회에서 통과되었다고는 하지만[* 빈민 기부를 위한 모금이나 물자는 본당의 모금함을 통해 모아야 하며, 구제를 받고 싶으면 이 모금함을 열 줄 아는 사람, 즉 동네 관리나 주임신부를 통해 빈민 기금을 받아가는 식이었다.] 배고프고 불안한 상황에 그러한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인클로저 운동]]의 여파도 이러한 불만을 부추기면 부추겼지 잠재우지는 않았다. 한편 [[수도원]]의 통폐합 그 자체는 물론이고, 를 통한 부동산 소득 제한은 기득권의 불만을 야기했다. 또한 여러 [[교구]]를 소유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만 빼고 수입을 완전히 몰수하며, 기존 교구 수입의 10%를 또 바치라는 법률도 통과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특히 1536년 10월의 '''은총의 순례'''로 그 절정을 찍게 되었다. 이때 지도자로 선임된 로버트 애스크(Robert Aske)는 정당성을 위해 나름대로 내부 규율을 엄격히 유지하고, 불만의 대상으로 국왕 헨리 8세 본인을 지목하는 것만은 철저히 막았다.[* [[수도원]]의 통폐합으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심하든간에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절대왕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헨리 8세를 비난하는 순간, '은총의 순례'에 가담한 사람들은 얄짤없이 반역죄로 목이 달아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자 헨리 8세도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폰트프랙트 성[* 오늘날의 서요크셔에 있다.]에서 협상 자리를 만든 다음, 24개의 요구사항을 접수한 뒤 '이번만은 사면해줄 테니 스스로 해산하라'고 명령하면서 애스크의 세력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행정 처리 속도에 불만을 가진 프랜시스 비고드 경(Sir Francis Bigod)이 세력의 일부를 다시 규합해서 1537년 '''스카보로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고드 경의 세력은 요크셔의 베벌리에서 [[야습]]을 당해 궤멸되었고 비고드 경, 로버트 애스크를 비롯한 '은총의 순례' 수뇌부들은 '''모두 반역죄로 검거돼서 사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